휴가_ Train No. B
“예. 산링입니다.”
상사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수두룩했지만, 전화를 받아야만 하는 게 직장이었고, 나는 분명히 이런 구조에 지쳐가고 있었다. 윗선에서 항의가 많으니 예민한 부분은 건들지말라는 말. 신문에 나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 범죄자들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말. 의원들 심기 불편하지 하지말라는 말, 말, 말, 말들. 언제나 상사가 하는 건 그런 말들은 지겨웠다. 나는 적당히 네 네 거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내 앞에서 쭈뼛거리는 신입에게 말했다. 어디까지 했지? 계속 브리핑 하게. 신입은 최근에 일어난 실종 사건에 대한 것들을 말했다. 신입의 어설픈 말을 들으며 사건 파일 위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마지막으로 발견된 장소와 인상착의들이 노란 바탕을 좀먹어갔다. 오늘부터 인력 증원 요청을 하고, 내일은 좆같은 상사를 위해 재롱잔치를 준비하고, 다음주는 지난 번 살인사건 피해자의 부검 결과를 확인 하고…….
“팀장님. 핸드폰 울리는데요.”
얼빠진 신입이 눈치도 없이 내 핸드폰을 가리켰다. 나는 탁상달력에 이번주 일정을 적으며 대답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원래 대장은 핸드폰 잘 안 본다며 낄낄거리는 부하 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째려보며 핸드폰에 떠있는 이름을 확인했다. 발신인 리우리우. 괜히 확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시키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요 근래 실종 사건이 늘어나서 서류가 산더미였다. 특히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지식인 계층의 사람들이 자주 사라진 건 분명 연관성이 있을 거라고, 형사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아직 가시화 되지는 않았지만 계속 캐다보면 분명 뭔가 나올 거다, 뭔가가.
“이 사건하고 이 사건. 상세한 사건 파일 요청해서 받아오고, 원한 관계나 연구 분야 쪽 확인해봐. 기한은 내일까지. 나는 먼저 퇴근한다.”
쌓인 서류들을 빠르게 확인하고 필요한 정보를 추렸다. 그리고 탁 소리 나게 서류철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저녁 먹기 직전의 시간대였다.뒤에선 들으라는 듯 대놓고 쏟아내는 녀석들의 불평이 들렸다. 나는 번복은 없다며 내 짐을 챙겨서 나왔다. 빼놨던 핸드폰은 다시 켰고, 미처 확인하지 못한 연락을 확인했다. 잠시 일 하는 사이 문자는 몇 개 더 와있었다. 그리고 발신인은 여전히 리우리우였다.
산링 내가 미안해
사랑해
전화 받아줘
난 너 없으면 못살아
산링, 제발…….
산링 내가 너희집 앞으로 갈게
나랑 대화 좀 하자
구질구질했다. 오늘은 집에 가지 않고 모텔에서 자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문득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왜 내가 피해야되는 거지. 잘못한 건 내가 아닌데. 언제나 가해자가 떳떳한 사회가 구질구질했다.
한참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몇 년 째 기본음으로 설정해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네. 산링입니다.”
“산링. 오늘 들어간 실종 사건은 묻어두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자네, 아까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추가 자료를 요청했더군.”
“모든 범죄자는 처벌을 받아야하는 게 저의 지론입니다.”
“그렇게 딱딱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러나. 휴가라도 좀 다녀오게. 보니까 자네, 경찰이 된 후로 단 한 번도 휴가를 쓰지 않았더군. 내일부터 일주일 시간을 주겠네.”
대답은 뒤늦게 나왔다.
“네. 알겠습니다.”
이 구질거리는 세상에 붙어있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내게 남은 의미는 뭘까. 일도, 연애도 잘 풀릴 때가 없었다. 나는 항상 실패자라는 생각만 들었다. 내가 이제껏 쌓아올린 건 대체, 대체 나는, 왜.
집에 가서 짐을 챙겨야겠다. 챙겨서 잠시 떠나자. 머리를 식히고 제대로 돌아오자. 난 아직 젊으니까 이 정도로 굴하지 않을 것이다. 일주일 간 있을 곳은, 그래, C시가 좋을 것 같다. 너무 한적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도시. 내일 당장 열차를 타고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