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혈_ Train No. B
냉장고를 열자 냉장고 문에 부딪힌 술병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내용물은 이미 다 비어 있어 쏟아질 것은 없었지만 나는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른 화로 술병들을 발로 밀쳤다. 중심을 잃은 병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 안 곳곳을 향해 구르기 시작했다.
“망할.”
도움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수도세며 전기세며 하는 자잘한 것들은 죄다 밀려 아예 끊겨 버렸고, 보온은 포기한지 오래던 터라 누런색 장판은 한 밤의 시멘트보다 더 차가웠다. 시리다 못해 아린 발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끝부분이 헤진 양말을 억지로 끼워 신었다. 이건 또 언제 빨았더라.
자려고 해도 잠은 오지 않는다. 설령 잠에 들어 자고 일어나봤자 내일은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불투명한 미래. 나이 쉰이 넘어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나. 내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불같은 짜증이 밀려온다.
10년 전, 어린 딸을 잃고 아내와 이혼을 한 후로부터는 뭘 해도 그저 실패뿐이었다. 하는 사업마다 반년을 지나지 못했고, 지인의 자신 있는 추천에 투자한 주식은 파느니 못 할 만큼 바닥을 쳤다.
나는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하는 일마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지, 누구든 기회만 주면 언제든 크게 성공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나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일어서고 싶다. 아니, 그럴 것이다. 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일단 돈만 있으면….”
불현 듯 고향집의 장롱이 떠올랐다. 일흔이 넘은 어머니는 은행을 믿지 못하고 돈이 생겼다 하면 무조건 장롱의 이불 속 깊숙한 곳에 모아두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쯤 얼마나 쌓여 있을까. 분명 적지는 않을 금액일 것이다. 그 정도 돈이라면 분명 내가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그거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지문이 잔뜩 묻은 거울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듯한 얼굴을 보자 왜인지 모르게 실소가 터진다. 며칠 면도를 하지 않아 지저분하게 난 수염과 잔뜩 헝크러진 머리카락, 눈동자의 검은자 주변으로 잔뜩 서 있는 붉은 실핏줄이 눈에 담겼다.
나는 벌떡 일어나 구석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던 외투를 입고 빈 가방을 들추어 맸다. 지금 당장 어머니의 집이 있는 C시로 가야만 한다. 어머니의 그 돈만 있으면 이제 이 생활도 끝이다. 나는 기필코 성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