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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1_ Train No. B

  어디로 갈래? 좋아요. 날벌레의 날개소리 같은 목소리들이 몇 번 허공을 오가더니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보면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다. 시계는 열두 시 삼십오 분 사십 초를 가리키고 있었고, 통유리로 된 문 너머로 다른 팀들이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무리지어 나가는 것이 보인다.

  아무도 남지 않은 빈 사무실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쾌적하다. 아무도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고 나도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에대한 생각을 잠시 묻어 둘 수 있었기에, 나는 은연중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숨을 깊게 들이쉬기 위해 입을 벌리면 한참동안 맞붙어 있던 입술들이 가까스로 떨어진다.

  완벽한 사각으로 접혀 있던 흰색 손수건을 소독약으로 적신다. 제 한계 맞닥뜨린 손수건이 흡수하지 못한 소독약은 손바닥을 거쳐 손가락 틈으로 흘러내린다. 투명한 액체가 손목을 지나고, 팔뚝에 가느다란 줄을 만들어 나를 휘감는다. 습진으로 부르튼 상처 사이로 약이 스며든다. 조금만, 더. 소독약을 쏟는 것을 멈출 타이밍을 계속해서 미루다가, 손수건이 잔뜩 젖어 네 각이 사라질 만큼이 돼서야 소독약 용기의 뚜껑을 닫는다. 이윽고 나는 모든 것이 가지런히 놓인 책상 위를 닦기 시작한다. 소독약은 쏟아진 물처럼 고이고, 잠시 책상을 거쳤다가 곧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나의 문제를 안다. 내가 나를 잘 알기에 더 괴로웠다. 한 마디를 하기까지에도 수십 번의 고민이 필요하고, 손을 씻고 나서도 뒤를 돌면 다시 내가 더러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둔 일을 하지 못하면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불안하다.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고도 금방 불쾌한 꿈을 꾸다 잠에서 깬다. 오늘도 힘들 것이고, 내일은 더욱 더 힘들 것이고, 모레는, 일 년 후에는…. 아마 머지않아 내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건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정신 차려라. 언젠가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 내 귓속을 파고들어 나오질 않는다. 짧은 그 한마디가 줄곧 나의 평생을 괴롭혔다. 어릴 적 유치원에서 만난 아이가 나를 넘어뜨려 상처를 내도, 학교 시험에서 단 1점 차이로 1등을 하지 못해도, 전학 간 학교에서 친구를 만들지 못해 방 안에서 혼자 울던 걸 들켜도 아버지는 항상 장롱 위에 두었던 기다란 매를 들며 같은 소리를 했다. 방문이 잠기고, 내 허벅지에 푸른 멍이 드는 와중에도 아버지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문 밖의 어머니는 내 울음소리가 커질 때 마다 오디오의 클래식 볼륨을 더 키울 뿐이었다. 머리카락이 곤두 설 정도로 묵직하게 날카롭던 콘트라베이스의 진동 소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얼마나 더 정신을 차려야 할까. 아버지가 말하는 그 정신은 뭘까. 나는 대체 뭘 알지 못하는 걸까. 왜 나의 부모님은 이 사람들일까.

  나는 당신들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책상과 노트북, 그리고 의자를 모두 닦고 화장실에서 손을 닦고 나오자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어머니에게서 온 문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더 이상의 인사말이나 여담도 없는, 딱 필요한 말뿐인 연락이었다. 시계는 한 시 십 초를 가리키고 있다.

 

 

  “너 설마 약 같은 걸 먹는 거냐? 신경안정제? 수면제?”

  손세정제를 꺼내기 위해 연 캐리어를 무심코 들여다보던 아버지가 그 안에 든 약통을 하나씩 꺼내들더니 약의 이름들을 무겁고도 정확하게 읊기 시작한다.

  “아니, 그게.”

  “정신병자야? 정상이 아니니까 이딴 걸 먹는 거잖아. 내말이 틀려?”

  아버지는 언젠가 자주 보았던 눈을 하고 정신없이 입을 움직여댄다. 언성이 높아지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름 모를 사촌 하나가 방을 나간다.

  정신이 아찔하다. 당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불현 듯 이유 없이 심장이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내려앉을 때마다 흰 알약들로 뱃속이 무의미하게 채워지는 기분을 당신은 아는지. 열 손가락이 습진으로 부르트고 상한 고기처럼 탁한 연홍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당신이 봤는지. 그리고 그런 나를 보는, 타인들의 시선들을 당신은 감당할 수 있는지.

  문득 살고 싶어졌다. 살기 위해서는 숨을 쉬어야했고, 숨 쉬기 위해서는 나의 공기를 오롯이 다 앗아가 버리던, 내 앞에 선 아버지의 폐를 멈추게 해야 했다. 쉴 새 없이 움직여 나를 위아래로 짓누르는 저 입술이 가만히 닫혀만 준다면 나는 조금이라도 더 호흡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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