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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_ Train No. B

  일영은 플랫폼의 천정을 한 번 올려다봤다. 반짝거리는 은색 천장에 사람들의 모습이 흔들리며 반쯤 비춰보였다. 다가오는 아이를 조용한 손으로 가볍게 밀어내곤 경찰들 무리 틈으로 섞여갔다. 아이는 덩그러니 남아있다. 사방치기 첫 번째 틀 안에 한 발로 섰던 때처럼.

 

  ‘당신이 10년 전 제 남편을 살해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는 제법 구체적인 이야기와 증거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싸늘하게 식으며 그는 기계적으로 A시의 차편을 확인하곤 같은 절의 스님을 찾았다. A시에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근 시일 내에 한 번 방문하겠습니다. 나는 편지를 받은 순간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녀의 남편이, 내가 갖지 못한 무엇을 가지고 있었을지 가늠했다. 처음부터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 내가 질투했을 것. 가지기를 바랐을 것. 죽여 부수기를 바랐을 것.

 

  “그 편지는 제가 보냈어요.”

 

  당신을 찾느라 꼬박 10년이 걸렸다는 여자의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가득했다. 희미한 불안과 확신이 섞인 눈동자. 그보다 확실한 , 10년의 시간동안 깎이고 다시 쌓이기를 반복한 퇴적된 분노. 저건 나에게 곤란한 눈빛이다. 내가 10년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비워내는 동안 당신은 그런 것들을 쌓았나보지. 이젠 분명히 손아귀에 없을, 레몬 향기가 콧가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버릇처럼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하자 여자가 몸을 굳힌다. 내가 하는 작은 행동 하나에도 긴장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의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이 선명히 시야에 들어왔다.

 

  “스님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말에서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랫입술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을 살폈다가, 주변을 둘러본다. 노을진 A시의 작고 고요한 절, 외진 산, 무성한 풀과 저 멀리 등진 채 홀로 한 발로 선 아이.

 

  “나는 혹시라도, 당신이 죄책감을 가지고 하루하루 속죄로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저 혼자 만족하고 저 혼자 편안해진 얼굴로 그렇게 살고 있을 수가 있어요?”

 

  “내세엔 제가 진창을 구르며 당신과 남편의 손에 죽을텐데. 그것을 위안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여자는 그 말에 꾹 말아 쥐었던 주먹을 뻗어 달려든다. 그걸 말이라고 해? 산산이 부서졌던 눈동자 속에서 불길이 인다. 나는 그것을 보며, 지금껏 느낀 적 없는 아주 희미하고 묘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빗줄기를 바라봤던. 불길을 바라봤던. 여자를 옆으로 가볍게 밀었다. 저녁시간대의 아무도 없는 작은 절, 외진 산, 바위가 많은 낭떠러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얼굴로 추락하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이것이 첫 살인처럼 느껴졌다.

 

  저 멀리 그녀의 자식처럼 보이는 대여섯살 정도의 아이가 있다. 재혼한 건가보지. 나는 벼랑의 높이를 다시 한 번 가늠하며 아이에게 다가간다. 아이에게 향하는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본다. 그늘진 머리가 차갑다. 노을이 세상을 불길처럼 삼키고 있다. 불 속에 산채로 던져진 기분이다. 불길이 일렁인다. 언젠가 이런 불길을 느껴본 적이 있지. 그림자가 저를 잡아먹고 나서야 아이는 나를 올려다본다. 그 애 어미의 시체를 등지고 선 나를. 지나치게 둔한 반응의 아이는 얌전하고 고요하다. 불길이 일렁인다. 아이. 그림자가 그을은 작고 둥근 검은 눈이. 시선이 얽혔다. 아이의 망막에 세상과의 묘한 거리감이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자식. 아무 말이 없는 아이. 눈빛. 비의 무게. 아이는… .

  등 뒤에서 미세한 빗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나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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